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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22
오피니언> 이순재 선생을 떠나 보내며
이순재 선생을 처음 만난 건 2014년 여름이었다. 공연 담당 기자 시절 대학로의 한 소극장에서 연극을 보는데 앞자리에 선생이 앉아계셨다. 딱히 화제가 된 연극도 아니었고 이름난 배우가 출연하는 작품도 아니어서 좀 놀랐던 기억이 난다. 연극이 끝난 뒤 선생을 따라나가 처음 인사를 했다. 선생의 손에는 연극 ‘황금연못’ 대본이 들려있었다. 선생이 주인공을 맡은 작품으로, 한 달 뒤쯤 개막 예정이었다. 시험이 코앞인 수험생마냥 선생은 대본을 들고다니며 틈틈이 대사를 외우고 있었다. 언제 한번 인터뷰를 하고 싶다고 했더니 선뜻 핸드폰 번호를 알려주셨다. 이후 그 번호로 여러차례 신세를 졌다.
첫 인터뷰는 2015년 여름에 했다. 1956년 연극 ‘지평선 너머’로 데뷔한 선생의 ‘데뷔 60주년’을 한 해 앞두고 이를 계기 삼아 인터뷰를 잡았다. 당시 선생은 두 편의 드라마에 출연 중이었다. 스케줄이 빡빡했다. 1시간 인터뷰 시간을 약속하고 만났는데, 이야기가 길어졌다. 선생은 다음 스케줄 장소로 이동하는 차 안에서 인터뷰를 계속하자고 하셨다. 녹음파일로 남아있는 그날의 인터뷰는 총 150분 분량이다. 그날 선생은 자신의 연기에 대해 발성도, 표정 연기도 미흡한 부분이 많다면서 끝없는 공부와 노력을 강조했다. 그리고 “마지막에 빛을 내는 예술가가 진짜 예술가”라고 했다. 그 말이 예언이라도 된듯, 선생은 자신의 마지막 작품인 드라마 ‘개소리’(2024)로 생애 첫 연기대상을 받으며 ‘진짜 예술가’의 길을 보여줬다.
두번째 인터뷰는 2020년 1월에 했다. 신문사마다 유튜브 채널을 강화하면서 새로운 동영상 콘텐츠가 필요한 때였다. 배우들이 각자의 명대사를 꼽아주는 ‘내 인생의 명대사’시리즈를 기획하고 섭외에 들어갔는데, 쉽지 않았다. 배우들로선 번거로운 과욋일로 생각하는 게 무리도 아니었다.
선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흔쾌히 오라고 하셨다. 선생은 연극 ‘앙리할아버지와 나’에서 주인공 앙리를 연기하며 했던 말을 ‘인생의 명대사’로 준비하고 계셨다. “인생이란 건 성공과 실패로만 가늠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짧은 인생을 굳이 성공과 실패로 가르려고 한다면 사랑하는 데 얼마나 성공했느냐, 바로 그거였어.”
그날 선생은 “성공하려고 아등바등하지도 말고 실패했다고 좌절하지도 말라”면서 “열심히 했던 모습으로 기억되면 그걸로 족하다”고 했다. 그즈음 선생은 해마다 연극을 서너편씩 소화해내고 있었다. 팔순을 훌쩍 넘긴 나이를 생각하면 경이로운 행보였다. 선생은 대본을 받으면 자신의 대사 하나하나에 번호를 매겨 총 대사수를 계산해두고 하루에 몇 개씩 계획을 세워 외운다고 했다. 열심 외의 비책은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선생이 ‘내 인생의 명대사’ 첫 출연자가 되면서, 이후 배우 섭외는 한결 수월해졌다. “첫 회는 이순재 선생님이 나오셨습니다”라는 말에 아이돌 가수 출신 배우까지 마음이 움직였다.
세번째 인터뷰는 2022년 2월 서울대총동창신문에 실렸다. 연극 ‘리어왕’을 교체 배우 없이 총 31회 전석 매진 공연으로 마무리한 직후였다. 동창회 신문 인터뷰였던 만큼 선생은 서울대 이야기를 많이 했다. 1954년 철학과에 입학한 선생은 당시 단과대학 별로 흩어져있었던 연극부를 통합해 서울대 연극회를 재건했다. 공연 준비 하느라 수업에 제대로 못 들어갔는데 교수님이 “연극도 잘하면 철학”이라며 넘어가주셨다는 이야기를 선생은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전했다.
선생에게 서울대는 추억이기만 한 게 아니었다. 선생이 데뷔했던 때는 배우가 ‘딴따라’ 취급받던 시절이었다. 생활에 절제가 없다며 배우에겐 중매도 안 들어왔다고 했다. 그래서 선생은 결심했다고 했다. “서울대 동문이라는 인식을 했다. 일탈하면 안되겠다. 실수하지 말아야겠다. 그렇게 해서 자제력이 키워졌다.”선생이 세대를 초월해 존경받는 어른으로 남게 된 데는 서울대의 몫도 있을 것이다.
이제 선생은 전화를 받지 않으신다. 상실감과 그리움에 가슴이 먹먹하다. 선생의 영면을 빈다.
이지영(약학 89) 중앙일보 문화스포츠 부국장 / 총동창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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